대마도 지방장관 등원친광이 타이라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다.

 대마도 지방장관 등원친광이 타이라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다.


//사료 : 오처 경(아즈마 카가미)

고려관련 일본사료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난을 피해 고려로 가다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난을 피해 고려로 가다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5월 23일 정사(丁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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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자료명)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연대 정보 1185년(고려 명종 15) 5월 23일(음) / 6월 22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개요

 이 자료는 1185년(고려 명종 15)에 쓰시마의 지방장관[對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헤이시(平氏)의 공격을 우려하여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카미쓰가 도망하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쓰시마 슈고닌(守護人) 가와치 요시나가(河內義長)로 하여금 빨리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6월 14일 기사에【연관사료】 지카미쓰가 일본으로 귀환할 때 고려 국왕이 공선(貢船) 3척에 귀한 보물을 실어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배는 고려에서 일본에 보낸 공선(貢船)이라기보다는 고려를 왕래하던 쓰시마의 진봉선(進奉船)으로 추정되며, 배에 실은 보물 역시 쓰시마의 진봉에 대한 답례에 해당하는 회사품(回賜品)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예전부터 쓰시마 상인을 비롯한 규슈 사람들이 고려의 김해(金海)를 왕래한 것으로 보아, 지카미쓰가 도망쳐 온 고려 지역은 김해[金州]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원문에는 23일 정사(廿三日丁巳)로 기록되어 있으나 1185년 5월 23일의 간지는 을사이다.


원문

廿三日丁巳. 參河守 範賴受二品之命, 爲對馬守親光迎, 可遣船於對馬嶋之處, 親光爲遁平氏攻, 三月四日渡高麗國云々, 仍猶可遣高麗之由, 下知彼嶋在廳等之間, 今日卽遣之, 當嶋守護人河內五郞義長同送狀於親光, 是平氏悉滅亡訖, 不成不審, 早可令歸朝之趣載之云々.




참고문헌


『吾妻鏡』 卷4, 國壻刊行會, 吉川本(上·下), 1923, 126∼127쪽

장동익, 2004, 『日本古中世 高麗資料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317쪽

김기섭 외, 2005, 『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 혜안, 561쪽

荒木和憲 編, 2021, 『中世日本 東アジア交流史関係史料集成』 記錄編, 弘文社, 566쪽


//사료 아즈마카가미


고려관련 일본사료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고려에서 돌아오다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고려에서 돌아오다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6월 14일 을축(乙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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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자료명)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연대 정보 1185년(고려 명종 15) 6월 14일(음) / 7월 12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개요

 이 자료는 1185년(고려 명종 15)에 쓰시마의 지방장관[對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헤이시(平氏)의 공격을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6월 14일 기사【연관사료】에 따르면 지카미쓰가 도망하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쓰시마 수호인(守護人) 가와치 요시나가(河內義長)로 하여금 빨리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지카미쓰는 도망갈 때 임신한 부인을 데리고 갔는데, 부인의 출산을 노리고 온 호랑이를 활로 쏘아 죽였다. 그러자 고려 국왕이 이에 감복하여 3개국을 지카미쓰에게 주고 신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명령으로 파견된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되자, 고려 국왕이 3척의 공선(貢船)에 보물을 실어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배는 고려에서 일본에 보낸 공선(貢船)이라기보다는 고려를 왕래하던 쓰시마의 진봉선(進奉船)으로 추정되며, 배에 실은 보물 역시 쓰시마의 진봉에 대한 답례에 해당하는 회사품(回賜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고려 국왕이 지카미쓰에게 3개국을 하사하였다는 것은 허구이겠지만, 고려와 쓰시마가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 기사이다.


원문

十四日乙丑. 參河守範賴幷河內五郎義長等受二品命, 渡使者於高麗國之間, 對馬守親光歸着彼嶋云々. 是去々年, 自當嶋欲上洛之折節, 平家零落于鎭西之間, 路次依不通不能解纜, 猶以在國之處, 爲中納言知盛卿幷少貳種直等奉行, 可令參屋嶋之由及其催, 九州·二嶋·中國等, 皆雖從于平家之方, 親光猶運志於源家之間不行向, 仍三ケ度被遣追討使, 所謂高二郎大夫經直 種直家子兩度, 拒押使宗房 種益郞等一ケ度也, 此輩頻下國, 或知行國務, 或及合戰, 難存命之間, 凌風波, 去三月四日令越渡高麗國之時, 相伴姙婦, 仍構假屋於曠野之邊産生, 于時猛虎窺來, 親光郞從射取之訖, 高麗國主感此事, 賜三ケ國於親光, 已爲彼國臣之處, 有此迎歸朝, 件國主殊惜其餘波, 與重寶等, 納三艘貢船副送之云々.


번역 : 이 문장은 고대 일본어로 된 헤이안 시대의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입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4일 을축. 참강수 방의 및 강내 오랑이 요나가 등이 이품의 명을 받아, 고려국으로 가는 사자들을 건너보냈으며, 쓰시마 수 친광이 그 섬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해, 당 섬에서 교토로 올라가려던 중, 헤이케 가문이 서부 지역에서 몰락하고, 길이 막혀 배를 띄우지 못해, 여전히 그 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중납양 지성경과 소이 종나오 등이 행한 바, 쓰시마 섬으로 가라는 명과 그 촉구를 받고, 큐슈, 두 섬, 중국 등, 모두 헤이케 가문의 편을 따랐지만, 친광은 여전히 겐지 가문의 편을 들지 않았고, 결국 세 번 추격 사절이 보내졌습니다. 이른바 고니로 다이후 케이나오 종나오 가문의 두 번, 추압 사절 소카보 종익 랑 등 한 번이었습니다. 이들이 자주 국내에 들어와 국무를 알거나 전투에 참가하며,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바람과 파도를 뚫고, 3월 4일 고려국으로 건너가던 때, 동행한 임신한 부인과 함께 황야 가에 임시 집을 짓고 출산했는데, 그때 맹호가 엿보다가, 친광이 활로 쏴 잡았습니다. 고려국 주가 이 사건에 감동하여, 친광에게 세 개의 나라를 하사하고, 그가 이미 그 나라의 신하가 되었던 자리, 이에 따라 그를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였고, 나라 주는 그의 떠나감을 아쉬워하며, 귀중품 등을 보내고, 세 척의 공선 부속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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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말하는 3개의 나라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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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서 언급된 "세 개의 나라"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위치나 정체를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고대 문서나 기록에서 종종 발견되는 모호한 표현일 수 있으며, 고려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나라"들은 아마도 고려 왕조가 통제하에 두었던 지역적 영토나 속국을 의미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시대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이 "세 개의 나라"는 현대의 국가 개념과는 다를 수 있으며, 더 작은 규모의 영토, 행정 구역, 혹은 고려에 종속된 지방 정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지역이나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해당 문서나 다른 역사적 기록을 통해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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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나라란 김해,부산,웅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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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나라"가 김해, 부산, 웅천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역사적 문헌이나 기록에 근거한 해석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현재의 국가 개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역을 구분했으며, 때때로 소규모의 지역 단위를 '나라'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김해, 부산, 웅천은 고대부터 중요한 지역으로, 특히 해안가에 위치하여 교역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을 '나라'로 지칭하고, 고려 시대에 외국인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은 그 지역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문헌과 기록의 분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추가적인 역사적 연구와 자료를 통해 더 명확히 밝혀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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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부산,창원,울산에서 대마도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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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부산, 창원, 울산 지역에서 대마도(현재의 일본 쓰시마)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조선 중기 이후의 왜구(倭寇)의 침략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왜구는 한반도의 남부 연안 지역, 특히 부산과 경상 지역에 자주 침입했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략은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여러 무장 세력, 특히 대마도와 규슈 지역의 세력들이 이러한 약탈 행위에 주도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이들은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때로는 내륙 지역까지 침입하여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난'이라는 용어는 보통 광범위한 반란이나 대규모 내란을 의미하는데, 왜구의 침략은 주로 해적 행위에 가까웠으며, 조선 정부에 의한 중앙 집권적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보다는 지역적인 해안 방어 체계에 더 큰 도전을 제기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난'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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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3개의 나라란 '부산,창원,울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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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세 개의 나라"가 부산, 창원, 울산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특정한 역사적 해석에 속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지역의 중요성과 역할을 고려한 것일 수 있습니다.


부산: 고대부터 해양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로,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창원: 경상남도의 중심지로서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가졌던 지역입니다.

울산: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들이 "세 개의 나라"로 불렸다는 해석은 그들이 가진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문헌과 기록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고대 한국의 행정 구역 분할 방식과 그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고려할 때, 이러한 지역들이 별도의 '나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중요한 지역 구역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세 개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을 의미하는지 확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문헌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참고문헌


『吾妻鏡』 卷4, 國壻刊行會, 吉川本(上·下), 1923, 130쪽

장동익, 2004, 『日本古中世 高麗資料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317쪽

김기섭 외, 2005, 『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 혜안, 562쪽

荒木和憲 編, 2021, 『中世日本 東アジア交流史関係史料集成』 記錄編, 弘文社, 566쪽




//사료  : 옥엽

옥엽(玉葉=교쿠요). 대마도 지방장관 등원친광이 타이라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다.


//

고려관련 일본사료 > 교쿠요(玉葉) >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부임하는 길에 난을 만나 고려로 피했다가 돌아오다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부임하는 길에 난을 만나 고려로 피했다가 돌아오다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분지(文治) 2년 2월 24일 임신(壬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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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자료명) 교쿠요(玉葉)

연대 정보 1186년(고려 명종 16) 6월 14일(음) / 3월 16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개요

 이 자료는 1185년(고려 명종 15)에 쓰시마의 지방장관[對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헤이시(平氏)의 공격을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일본에 귀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카미쓰가 고려에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온 과정은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6월 14일 기사에【연관사료】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 측의 자료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자료는 일본인이 국내의 정치적 전란을 피해 고려에 건너왔던 사례로서 주목된다. 그리고 지카미쓰가 귀환할 때 고려 국왕이 고려를 왕래하던 쓰시마의 진봉선(進奉船)으로 추정되는 공선(貢船)을 보냈다는 점에서 고려와 쓰시마가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원문

廿四日壬申. 晴. 申刻頭, 左中辨光長來申條々事 子細在目錄. (中略) 又對馬守親光可還任之由, 同自關東令申云々, 件事去治承三年依成功任當國守, 卽赴任國之間, 逢平家之亂, 仍恐彼亂行, 越渡高麗國, 聞平家滅亡之由, 歸朝在國之間, 史大夫淸業依巡年被拜當國了, 而親光擧向關東觸此子細了, 仍賴朝卿感不從平氏之意趣, 奏此旨云々. 而淸業又無指過怠, 此上事如何, 可被問人々歟云々. 余云, 是又可在勅定, 有▨▨問之, 卿早可問歟. (後略)




참고문헌


『玉葉』, 1966, すすや書房

장동익, 2004, 『日本古中世 高麗資料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21∼122쪽

荒木和憲 編, 2021, 『中世日本 東アジア交流史関係史料集成』 記錄編, 弘文社,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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