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위키 징기스칸의 달란 발주트 전투 부분과 징기스칸 금나라 노예설
영어 위키 징기스칸의 달란 발주트 전투 부분과 징기스칸 금나라 노예설
https://en.wikipedia.org/wiki/Genghis_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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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üjin was soon acclaimed by his close followers as khan of the Mongols.[48] Toghrul was pleased at his vassal's elevation but Jamukha was resentful. Tensions escalated into open hostility, and in around 1187 the two leaders clashed in battle at Dalan Baljut: the two forces were evenly matched but Temüjin suffered a clear defeat. Later chroniclers including Rashid al-Din instead state that he was victorious but their accounts contradict themselves and each other.[49]
Modern historians such as Ratchnevsky and Timothy May consider it very likely that Temüjin spent a large portion of the decade following the clash at Dalan Baljut as a servant of the Jurchen Jin dynasty.[50] Zhao Hong, a 1221 ambassador from the Song dynasty, recorded that the future Genghis Khan spent several years as a slave of the Jin. Traditionally seen as an expression of Song arrogance, the statement is now thought to be based in fact, especially as no other source convincingly explains Temüjin's activities between Dalan Baljut and c. 1195.[51] Taking refuge across the border was a common practice both for disaffected steppe leaders and disgraced Chinese officials. Temüjin's reemergence c. 1195 having retained significant power indicates that he probably profited in the service of the Jin. As he would later go on to overthrow that state, such an episode, detrimental to Mongol prestige, was omitted from all their sources. Zhao Hong was bound by no such taboos.[52] // 한글로 번역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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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진은 곧 그의 가까운 추종자들에게 몽골의 칸으로 인정받았습니다.[48] 토그룰은 그의 종복의 승진에 만족했지만 자무하는 불만을 느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어 약 1187년에 두 지도자는 달란 발주트에서 전투를 벌였고: 양쪽 세력은 서로 비슷했지만 테무진은 분명한 패배를 겪었습니다. 나중의 연대기 작성자들, 라시드 알-딘을 포함하여, 그가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설명은 서로 모순됩니다.[49]
현대의 역사가들인 라체네프스키와 티모시 메이는 테무진이 달란 발주트에서의 충돌 후 10년간의 대부분을 중천 진나라의 종복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매우 확신합니다.[50] 1221년 송나라의 사절인 자오 홍은 미래의 청기스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몇 년 동안 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송의 오만으로 간주되었던 이 Aussage는 특히 달란 발주트와 대략 1195년 사이의 테무진의 활동을 설명하는 다른 출처가 없기 때문에 현재 사실을 기반으로 생각됩니다.[51] 국경을 넘어 피신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스텝의 지도자들과 망명한 중국 공무원들에게 흔한 관행이었습니다. 테무진이 대략 1195년에 다시 나타나면서 상당한 권력을 유지한 것은 그가 진나라의 종복으로서 이익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 국가를 전복시키므로, 몽골의 명성에 해로운 그러한 사건은 모든 그들의 출처에서 생략되었습니다. 자오 홍은 그러한 금기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52]
: 테무진은 서기 1187년 혹은 서기 1189년 달란 발주트 전투에서 믿던 타이치우드+쟈무카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다가 막판에 쟈무카에게 털린 것으로 보인다.
쟈무카는 테무진 편에 섰던 치노스족의 왕자들을 70여개 솥에 넣고 팔팔 끓여 죽였다.
테무진은 그후 서기 1195년 혹은 서기 1196년까지 무려 10년간을 공백기로 지내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러 기록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테무진이 금나라로 피신한 후 금나라의 노예로 10년간의 세월을 지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테무진이 금나라로 가서 노예가 된건 남송측 기록에 나오니 사실이겠지만
테무진 탄생에 대한 몽골측 탄생 신화를 보면 테무진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족 적장 '테무진 우게'를 죽이고 돌아온지 몇일 만에 자기 아들이 응애 하고 태어나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으로 했다고 한다.
이건 무언가 암시가 있는거 같다.
사실 진짜 테무진은 금나라로 가서 혹독한 노예 살이를 하다가 죽고
10년 후 요시츠네가 자기가 테무진이라고 주장하며 몽골 땅에 등장한게 아닐까.
마치 독립군 장군 김일성은 죽고 사라졌는데. 젊은 김성주가 나타나서
내가 김일성이야 낄낄낄 거린 것처럼.
[몽달비록蒙鞑备录]이라는 사서로
서기 1221년 남송(南宋)의 관리 조공(趙珙)이 몽골에 조공을 간 뒤 스스로 기록한 것으로 그 기록에는 "현재의 징기스칸은
젊은 시절 금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10여년' 동안 노비 생활을 한 후 탈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노비생활 10년에 금나라 용병대장으로 있던 시기를 포함시킨다면
대략 서기 1189년부터 서기 1196년까지 7년간 노예 살이하고
서기 1200년 쯤까지 몸값 떼울려고 용병 뛰다가 탈출한게 아닐까
그리고 몽골측 황실 기록인 원조비사에선
테무진 그러니까 징기스의 유아 시절부터 서기 1189년 후까지의 행적이 적혀있긴하나
그가 몽골의 이름 있는 대족장 가문의 아들이라면
노예 살이를 했다거나 금나라 용병장교나 하고있는건 좀..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 징기스가 몽골 토박이란 증거는 원조비사말곤
딱히 없다
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도 사실 신라 토박이가 아니라
멀리서 온 흉노계 중국인인데
계림의 숲에 걸린 금궤짝에서 김알지 애기가 나왔단
얘기는 영 그의 실제 출신을 가리려는 수작이다
가야 시조 김수로 역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로
그의 진짜 국적을 가리지만
김수로는 서기 3세기 중후반 부여에서 내려온 선비 계통
유목민이란게 김해 대성동 고분 출토로 드러난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 주몽도 사실 졸본부여인들이 숭배하던
시조 동명에 어떤 신원불상의 고구려 최초 왕을 하나로 합체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 신원불상의 사람은 보통 주몽 추모 도모 이렇게 기록되지만
이는 동명의 발음 변화에 불과하다
졸본부여를 고구려국으로 만들어 일사분란하게 지휘한
최초의 왕은 여전히 미스터리에 가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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