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츠네의 카게무샤 수급의 미스터리
요시츠네의 카게무샤 수급의 미스터리
(내가 ai로 그린 그림)
요시츠네의 카게무샤 수급의 미스터리
아즈마카가미는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를 적은 기록이다.
하지만 후대에 적힌 기록이라서 사료적 가치가 낮다고 하는게 정설이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서기 1189년 음력 윤 4월 30일 (오슈의 '히라이즈미' 도시의 클랜의 두목) 후지와라 야스히라가 요리토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백 기騎(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병력일듯)을 데리고 코로모가와의 민부소보의 저택을 자기 집으로 삼아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있던 요시츠네를 쳐서 '무려 '합전合戰'을 했다고한다.
표현을 봐라. 무려 '합전(合戰)'이다.
요시츠네측의 병력 숫자는 언급도 없어서, 요시츠네측 병력 숫자가 얼마인지
확실히 그 숫자에 대해선 모르겠으나
'합전(合戰)'이란 표현을 쓸 정도면 그 수가 적지 않았으리라 본다.
즉 전투가 벌어졌다는 말이고
이때 요시츠네의 가인들(종들)이 전투를 치뤘으나 패배했다고한다.
이때 요시츠네의 가인들의 숫자에 대한 말은 사료에 전하는 말이 없다.
그러나 야스히라가 수백 기騎(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거같음)를 거느리고 쳤다는 점에서 볼 때,
요시츠네 하나 잡겠다고 그렇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다는건 여러가지로 생각해볼수있다.
요시츠네의 퇴로 차단의 성격도 있을수있겠으나 퇴로 차단하겠다고 수백명 동원하는건 이상하다.
요시츠네의 가인들도 상당한 숫자였다고 보는게 맞겠다.
그렇다면 만만찮은 전투가 벌어졌고 , 그러나 요시츠네측 병력이 중과부적이라서 패배했을수있다.
그래서인지 야사들에도 당시의 전투가 매우 심각하고 긴박하게 묘사되어있다.
중 벤케이가 요시츠네의 자결의 시간을 벌기위해 끝까지 막다가 화살들을 무수히 쳐맞아 선 채로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고하지만 야사에나 전하는 얘기이고 정사에는 그런 말은 전혀 없다.
아즈마카가미로 다시 돌아가자.
요시츠네는 결국 자기가 모시는 부처 신을 모셔둔 '지불당'으로 들어가서
아내와 자식을 촥 촥 죽인 후, 우풉!하고 자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당 기록은 요시츠네가 미나모토 요시토모와 하인 토키와고젠 사이에서 태어난 6번째 아들 즉
서출 소생이란 기록으로 끝을 맺어가며 요시츠네가 겐페이 합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고공 승진,고속 출세 하다가
순식간에 모든 관직에서 파직당했다는 것으로 요시츠네의 경력을 끝 맺는데.
이걸 보면 요리토모가 요시츠네를 싫어하고 숙청하려든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허락을 받지않고 천황가에서 고속 출세해서
천황가의 딸랑이 짓을 했다는 괘씸죄도 있겠지만 서출 소생 주제에 감히 고속 출세를 해? 네이놈 이런 심보에서 요시츠네를
숙청하려했던 것일수도 있어 보인다.
당시 중세 일본 사회는 신분제가 빡빡했고, 신분에 맞지도않는 분수에 넘치는 출세를 그 자신을 괴롭히고 망친다는 저주스러운 그런 관념이
팽배했다고한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요시츠네는 자살했고 요시츠네의 인생은 그렇게 정말 망했다는걸로 결론이 나겠으나
코로모가와의 민부소보의 자택에 대한 고고학 발굴 조사 결과 저택은 불에 타지도않았고 어떤 피해도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서
사실 전투도 없었던게 아닐까라는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와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은 도대체 뭐가 되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즈마카가미의 음력 5월 22일의 기록을 보면, 카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로 오슈 히라이즈미에서 전령이 왔다.
지난 달 말일에 야스히라가 민부소보의 저택에서 요시츠네를 주살(죽였다)했으며, 그 머리(요시츠네의 수급)를 뒤따라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상한게, 4월 30일 기록엔 '자살했다'는데.
5월 22일 기록은 '살해했다'이다.
기록이 앞뒤가 맞지 않다.)
이 소식을 들은 요리토모는 이미 음력 5월 19일에 음력 6월 9일 쓰루오카의 하치만의 탑 공양식을 하기로 교토와 약속해놓은 상태였는데.
요시츠네가 살해당했단 소식을 듣고는 "아 내 자신이 더러워져서 탑 공양식을 하지못하겠다."라고 교토에 편지를 보냈으나 씹혔다.
그래서 요리토모는 끙 하고 오슈에 사신을 보내서 "보내는 머리를 도중에 두어라."라고
요시츠네의 수급 검사를 잠시 연기 시켰다.
요시츠네의 수급 검사는 음력 6월 13일에 치루어졌다. 카마쿠라에서 하지않고, 카마쿠라 근처 해변가에서 검사했고,
요시츠네의 수급을 검은 옻칠을 한 나무 술통에 넣고 (수급의 부패를 막기위해 술에 넣은듯)
고평(高平)이란 자의 하인 두 사람이 실어날랐다고 한다.
카지와라 카게토키 등이 해변에서 요시츠네의 수급이 맞는지 틀린지 검사를 맡았다고한다.
근데 야사에 따르면 검사를 한 후, 요시츠네의 수급을 카마쿠라로 가져가지않고 해변에 버렸다고 한다.
요시츠네의 수급이 아니었던걸까?
그리고 얼마 후 요리토모는 오슈를 공격했고 오슈는 싸그리 학살을 당했고 야스히라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목이 잘렸다.
이복동생 요시츠네를 멋대로 죽인거에 대한 보복일까 아니면 이용가치 떨어졌으니 토벌한걸까
아니면 카게무샤를 대신 죽이고 시간 버는 속셈이란걸 간파하고 바로 토벌에 들어간걸까?
오슈 히라이즈미에서 카마쿠라까지는 약 2주일 거리다. 사신이 오면서 중간 중간에 쉰다던가, 날씨라던가 이런걸 감안하면
4월 30일에서 5월 22일 사이의 시간차는 그리 납득하지못할 수준은 아니다.
후대 요시츠네 수급 관련 의문 이론의 핵심 중 하나인 "왜 요시츠네 수급을 보내는데 40일이나 걸렸나"도
요리토모가 탑 공양 의식을 불결해진 상태로 치룰수는 없다고 연기한걸 감안하면 이상한건 아니다.
그런데 오슈(일본열도 동북 지방 끝 부분 쯤에 있다)가 토벌당해 다 뒤진 후에도, 카마쿠라에는 일본열도 동북 지방 끝에서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여전히 살아있고 반란군을 규합해서 카마쿠라로 쳐들어올려한다는 전령들의 보고들이 왔다.
사실 요시츠네의 수급은 카게무샤의 수급이고,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일본열도 동북 지방으로 보내서 급히 민중들을 모아 게릴라 군대를 편성하게하고
야스히라 자신을 시간을 벌려했던게 아닐까?
실제로 일본열도 동북지방에는 요시츠네가 생존해서 이리 저리 이동해 다녔다는 전설들이 존재한다.
학계에선 그냥 이야기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중들이 이곳 저곳 전전하며 이야기 만들어낸겨 하고 무시하지만
전설들의 분포가 일정한 경로를 띄고 있어서 뭔가 요시츠네가 생존해서 훗카이도쪽으로 이동하고있는듯한 모습을 띄고 있어서
일본 다큐에도 자주 재밌는 소재로 다루어지곤 한다.
요시츠네 생존설과 훗카이도 도피설은 조선 정조 때의 기록 [청장관전서]에도 나올 정도로 매우 유명한 얘기다.
청장관전서엔 요시츠네가 서기 1189년에 죽은 혹은 도피한 당시의 나이가 '27살'로 나오는데.
그 나이를 토대로 거꾸로 계산해보면 엉뚱하게도 요시츠네 생년이 기존의 서기 1159년이 아니라 서기 1162년으로 나온다.
이건 징기스칸의 출생 연도가 아닌가!
징기스칸의 출생 연도는 서기 1155년 설과 서기 1162년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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